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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나가는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론




국영 쇼와(昭和)기념공원

일본의 5월3일은 ‘헌법기념일’로 공휴일이다. 이날을 전후해 5~7일, 직장에 따라 12일간 연휴가 이른바 ‘골든위크’. 때도 됐고 해서 며칠 전 일본 헌법사에 유명한 스나가와(砂川) 사건의 현장, 다치카와(立川)비행장 터를 찾았다.

▽국영 쇼와(昭和)기념공원

방위청(한국의 국방부에 해당)이 있는 이치가야(市ヶ谷)역에서 JR소부센(總武線)을 타고 다음 역, 요츠야(四ツ谷)에서 내려 JR주오센(中央線) 특쾌(特快)로 갈아 탄다. 다섯 정거장, 32분 걸려 도쿄의 부심, 다치카와에 도착했다. 가벼운 전철 나들이지만 편도 요금 540엔, 한국 돈으로 5,400원이다.
각역정차로 가도 요금은 같으나 요츠야에서 20번째 역으로 46분 걸린다. 14분 차이. 쾌속은 15번 서는데 41분, 통근쾌속은 7번 정차에 35분 걸린다.

말로야 여유를 갖고 살자 하면서도 언제부턴가 ‘빠르지 않으면 못 견디는’ 시간의 강박 속에 빠져든 것 같다. 몇분을 정거장에서 기다려 특쾌를 탓으니. 그렇게 몰아넣은 게 뭣이던고. 몇 푼과 삶의 여정을 맞바꾸는 임금노동 사회. 그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철도회사는 각역정차, 특쾌, 쾌속, 통근쾌속 등 알송달송한 말을 고안해냈다. 철로 복복선화면 가능한 일이니 서울 근교 거주자도 이게 있으면 편할 듯 싶지만, 에이 월급쟁이 인생들을 더욱 죄는 쇠목걸이 하나만 더 느는 거 아닌가 싶다.

다치카와역에서 걸어서 15분 정도면 닿는 곳이 다치카와 비행장 터에 들어선 국영 쇼와(昭和)기념공원이다.
1922년 만들어진 다치카와 비행장은 1945년 일본을 점령한 미군에 접수돼 비행장, 육군항공창, 육군항공기술연구소로 사용되다 1977년 일본에 반환됐다.
쇼와천황의 재위 50주년(1975년)기념 사업 가운데 하나로 이곳을 국영 공원으로 단장하는 안이 나왔고 1983년 일반에 공개됐다. 총 넓이는 170ha, 51만여평이며 연간 270만명이 찾는다. 보다 쾌적한 공원을 만들기 위해 보수공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공원내의 자전거 도로, 스포츠에어리어, 레인보우 풀
출처 : http://www.showapark.jp/active/index.htm

시원한 분수대며 죽죽 뻗은 도로, 호수. 수천명이 즐기는 잔디밭. 너른 공원의 여기저기는 온통 꽃잔치다. 마침 ‘캘리포니아 포피’ 축제 기간이었다. 전성기의 스트로베리 캔들, 네모피라도 상춘객을 즐겁게 해주었고 튤립, 모란, 철쭉도 아직은 볼만했다. 늦봄의 여왕이라 해도 좋을 아지사이는 꽃망울이 올라오려는 참이었다.

▽사가와(砂川)사건
이 터에서 1957년 7월 사가와 지역 농민과 대학생, 노조원 등은 다치카와 비행장을 확장하려는 미군 계획에 반대해 시위를 벌였다. 일본 정부가 미군 계획대로 추진하기 위해 기지 내 민간 소유지에서 측량을 강행하자 시위대는 비행장 철책을 부수고 기지 안으로 난입했다. 주모자 7명이 체포돼 미일안보조약에 근거한 특별법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사실 사건 자체는 대수롭지 않았는데 일본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도쿄지방재판소의 판결이었다. 미군 주둔 자체가 일본 헌법 9조(전력 보유 금지, 집단자위권 행사 금지)에 위배되는 까닭에 미군 주둔에 따른 형사특별법도 위헌이며 따라서 그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이들은 전원 무죄라는 판결을 내려 충격을 던진 것이다. 일본은 헌법재판소가 따로 없어 일반법원에서 헌법 관련 사항도 판단하고 있다.

1959년 12월,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는 하급심의 결정을 뒤집었다.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의 존립에 매우 중대한 관계를 갖는 고도의 정치성은 요하는 문제, 즉 통치행위인 만큼 명백하게 위헌으로 인정되지 않는 한, 재판소가 이같은 판결을 내리는 것은 사법심사권의 재량을 넘는 것이라는 것이 요지였다.

사가와 사건과 이에 따른 판결을 당시 일본 사회 내에 반미 감정이 노골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유별난 사상과 신념을 가진 판사 개인의 판결로서가 아니라, 전화(戰禍)를 교훈 삼아 생겨난 ‘평화헌법’을 지키려는 세력이 그만큼 광범히 존재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주일 미군의 존재 조차 위헌이라고 판단했을 정도이니, 요즘처럼 개헌론자들이 당당하게 ‘자위대의 군대 명문화’ 운운하는 세상과는 판이하다.

▽막가는 개헌론
일본의 집권당 자민당은 창단 50주년인 2005년안으로 개헌안을 확정짓기로 했다. 올해에는 제1야당 민주당의 일부 의원이 ‘헌법의 날’을 맞아 개헌론자들이 주도한 집회에 참석했다. 아시아 침략의 역사,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인해 겪은 아시아인들의 고통을 제대로 알 리 없는 여야 철부지 의원들은 그저 ‘연합국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니 바꿔야 한다고 외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고도 정신 못차린 채 아돌프 히틀러총통에 휘둘려 제2차대전에 휘말린 독일처럼 갈 데까지 가보고서야 후회할 것인가.

일본 헌법이 발효된 게 1947년이니 올해로 57년째다. 그간 개헌 저지에 앞장서 왔던 호헌의 보루, 사회당은 지난해 중의원 선거에서 괴멸했다. 평화 헌법을 바꾸면 안된다는 당론을 역시 지켜온 공산당도 세력이 줄면서 사회당과 표를 모아도 개헌 저지선인 3분의 1 의석에 못미친다. 게다가 가장 큰 야당인 민주당의 소장파 의원 마저 개헌 찬성으로 돌아섰으니 이미 평화헌법 개정은 기정사실화 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오로지 시기만 남은 꼴이다.

제국주의 침략국가 일본의 틀을 바꿔 놓았던 평화헌법.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위기에 놓인 일본의 평화헌법은 누가 지킬 것인가. 일본의 양심 세력 밖에 없는가. 헌법 9조만큼은 손대면 안된다는 의견이 아직 많기는 하나 갈수록 약해지는 것이 일본의 양심 세력인 것만 같아 걱정된다.
침략과 학살의 피범벅, 쇼와천황의 재위 50년을 뭐 그리 못잊고 기념할 거라고, 이 멋진 공원에 하필이면 ‘국영 쇼와기념공원’ 이름을 붙였을까. 20년도 전에 이미 그 정도로 정신이 산만해진 터에 새삼스레 이제와 정신 차리라고 해봐야 (우이독경)牛耳讀經이 아닐까 싶어 착잡하다.

역사의 구더기 같은 존재, ‘제국’에 대한 환상은 민주와 자유의 그늘 아래 동서를 막론하고 아직 살아 꿈틀대고, 전쟁의 책임을 새겨보지 않는 사상적 무뇌아 상태의 일본 사회에는 시대착오적 천황제가 존속되고 있다.

오늘의 일본인, 그들은 과연 이 망각의 업보를 장차 어찌 지려는 것일까.

쇼와 공원 홈페이지

일본 도쿄=도깨비뉴스 리포터 지안 jian@dk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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