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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던 한국 1호 항공기 51년만에 `부활`




위 사진 1953년 한국전쟁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을 때 경남 사천 비행장에서 군 관계자들이 한국의 1호 항공기 `부할`호의 동체 설계를 논의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53년 10월 마침내 1호 항공기가 하늘을 날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랑스런 항공기는 감쪽 같이 사라졌고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도 지워져 버렸습니다.

`부활`호가 첫 비행을 한지 51년 만인 올 봄 당시 항공기를 제작했던 이원복씨 등이 어느학교 지하창고에서 녹쓸고 녹쓸어 겨우 형태만 남은 `부활`호를 찾아냈고 이후 4개월간의 복원 작업끝에 `부활`호는 51년전 모습 그대로 다시 그렇게 날고 싶어 했던 푸른 하늘을 날 수 있었습니다.

이 `부활`호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며칠전 대부분의 언론매체에 사진 1~2장과 함께 간략히 소개됐습니다만 도깨비 뉴스는 공군뉴스레터 팀으로 부터 사진과 기사를 제공 받아 그 자세한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소개합니다.


‘부활’호, 51년 만에 다시 살아나기까지

△ "51년 만의 활주" 복원된 부활호가 주기장을 달리고 있다.

51년 만의 엔진소리

공군 장병들은 물론, 기자들이 잔뜩 모인 대구 기지 주기장. 아담한 경비행기가 이륙 준비를 합니다. 모두 숨을 죽인 가운데 날카로운 시동음이 울립니다. 프로펠러가 덜컥 움직이는가 싶더니, 시원한 배기음과 함께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순간 환호성이 터져나왔습니다.


△ 힘차게 시동이 걸린 부활호.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체 제작한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가 51년 만에 부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부활호는 지난 1953년 10월, 공군 기술학교 교관 등을 중심으로 ‘우리 스스로 항공기를 만들어 보자’는 시도로 만들어 낸 명실상부한 국산 1호 비행기. 한국 항공사의 큰 이정표가 된 ‘사건’을 이번에 다시 바로 세운 것입니다.

이날 51세 `부활호`는 KT-1기와 나란히 지상 활주함으로써 반세기의 역사가 만나는 뜻깊은 시간도 만들었습니다.


전쟁 직후 국민의 희망을 되살린 부활호

△ 개발 당시의 부활호.

2인용 경비행기인 `부활호`는 항공기 제작을 위한 실습과 조종사들의 연습기로 활용하기 위하여 제작되었습니다. 1953년 10월 11일, 조종사 민영락 씨와 설계자 이원복 씨가 탑승, 시험비행에 성공했습니다. 4개월만에 우리 손으로 비행기를 제작했다는 사실에 이승만 대통령은 물론 국민들은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은 전쟁으로 피폐한 우리의 희망을 되살리자는 의미로 "復活"이라는 붓글씨를 직접 써서 전했습니다. `부활호`는 이후 1955년까지 연락기와 연습기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한국항공대학(대구 달서구, 경상공업고등학교의 전신)에 기증했다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그만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시 빛을 보기까지

△ 잊혀져 있던 부활호가 발굴되던 순간.

‘부활호`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당시 설계자인 이원복 씨의 남다른 애정과 공군의 기술력, 그리고 노력이 있었기 때문. ‘우리가 만든 항공기를 되찾자’는 마음으로 동분서주했지만, 민간으로 넘긴 다음에는 기록이 남지 않아 방법이 없었습니다.


△ 개발자 이원복씨(左)와 조종사 민영락씨(右).
그러던 차에 신문에서 ‘최초의 국산 항공기 부활호를 찾는다’는 기사를 본 경상공고 에서 일했던 이방치 씨의 제보로 올해 1월, 마침내 부활호를 찾게 되었습니다.

경상공고 지하창고에 잊혀져 있던 부활호는 날개, 엔진 등은 모두 없어진 채 동체 뼈대만 남아 있던 상태. 얼핏 보기엔 앙상하게 녹슨 철제 구조물일 뿐이었지만, 이원복 씨는 동체 앞에 새겨진 ‘부활’이라는 이름을 한번에 알아보았습니다.
한국항공대학으로 기증된 후 1960년대까지 학생들의 연습기로 사용되다, 항공기 수명도 다하고 마침 경상공고가 들어서면서 지하창고로 옮겨진 뒤 그대로 잊혀져 버린 것입니다.


복원과정까지 예전 방식을 그대로 본따 “수공업 제작”

△ 발굴한 뼈대로 복원 방법을 논의하는 복원 팀.

공군은 이를 인수하여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개발팀과 같은 27명의 전문 정비 요원으로 복원팀을 구성, 4개월 동안 복원작업을 실시했습니다.
복원팀은 남아있는 뼈대에 의존하여 전체 모양에 대한 수치를 역으로 계산하였고, 이씨와 故문용호(당시 일등중사, 올해 78세로 작고)씨의 자문까지 더해 200여 장에 이르는 설계도를 그려가며 완벽한 복원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50년 전의 부품을 구하기 위해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와 중고시장을 뒤지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만들던 당시와 똑같은 방법으로 알루미늄을 손으로 하나하나 두드려 부품을 만들어 나갔고 직접 천을 재단하여 동체와 주익을 만들었습니다.
`復活`의 제호와 `1007` 번호의 재생만은 컴퓨터의 힘을 빌었습니다. 자료사진과 비교해 가며 훼손된 글자 모양을 그대로 살려냈습니다.


△ 이원복씨의 자문이 복원에 큰 역할을 했다.

완전 복원된 부활호는 공군사관학교에 전시되며, 2대를 추가로 제작하여 전쟁기념관과 경상공고에 전시할 예정입니다.


△ 우리 항공 역사의 큰 이정표 부활호. 공군사관학교, 전쟁기념관 등에 전시될 예정이다.



개발자 이원복 할아버지 “51년 만의 해후”

뉴스레터 이원우 리포터가 부활호 복원 기념행사 현장에서 귀중한 손님 두 분을 만났습니다. 부활호 개발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원복 씨(78세)와 부활호를 처음 조종한 민영락 씨(79세)입니다.


△ "오랜만이다" 부활호 조종사 민영락씨(左)와 개발자 이원복씨(右).

할아버지 두 분이 아이 같은 미소를 띄고 되살아난 부활호 앞에 다가온다. 51년 전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이 부활호를 만들고 하늘을 날았던 두 사람, 민영락 씨(당시 조종사)와 이원복 씨(당시 개발 및 정비사).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50여 년 만에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떨리는 손으로 부활호의 동체를 쓰다듬는다. 이제까지 낯선 곳,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것 같던 부활호는 비로소 자신이 있을 곳을 찾은 것 같다.


51년 만에 부활 호와 상봉 “그때와 똑같네요”


△ "그때 모습과 정말 똑같네요" 부활호의 날개 아래로 들어오신 두 원로 분은 감격스러우신지 몇 번이고 ‘부활’이라는 휘호를 쓰다듬는다. 항공기의 문을 열고 비행기 안 여기 저기를 둘러 본다. 옛 기억을 더듬으시는 손길과 눈길이 꼼꼼하기만 하다. 50여 년 전처럼 이원복 씨가 뒷좌석에 앉고 민영락 씨가 조종석에 앉았다.

헤드셋을 조심스럽게 쓰고 찬찬히 계기들을 만져 본다. 감회에 젖은 두 분께 조심스럽게 인사를 드렸다.
“너무 감개무량하지요. 죽은 친구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부활(復活), 그 이름은 우연이 아니었나보다.


△ 추억을 살려 부활호에 탑승한 두 사람.

전쟁 직후, 상처받은 국민들의 용기를 되살리고 싶던 염원, 우리 하늘을 우리 힘으로 지키겠다는 항공 산업에 대한 열망이 오늘 이 자리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처음 제작할 당시의 상황은 어땠나요?

△ 1953년 당시 동체를 설계하고 있는 개발자들.

“계획부터 제작을 끝내기까지, 4개월 정도 걸렸어요. 다들 열심히 했죠. 상황이 어려웠던 시절이라,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도 없었어요. 구할 수 있는 부품, 가지고 있는 자재를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지. 요리에 따라 재료를 구한 게 아니라, 있는 재료로 요리를 하는 것처럼.”


△ 어려운 여건 속에 부활 호는 탄생했다. 뼈대 제작 장면.


△ 1953년, 시험 비행을 하고 있는 부활호.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때라 제작 여건은 어려웠다. 공군 기술학교 교관 등으로 이루어진 27명의 개발팀은 사천기지 허름한 막사에서 설계를 했고, 부족한 자재는 발로 뛰어 구했다고 한다. 자체 생산이 어려운 부품은 미 공군기지를 뒤져 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항공기 번호는 제작순서에 맞춘 `1` 대신, 특별히 `1007`로 정했다. `1007`은 다부동 전투(1950. 9)에서 산화, 최초로 전사한 조종사 천봉식 중위를 기리기 위한 것으로 그의 성씨인 `천`과 국운을 바라는 행운의 수 `7`을 합한 것이다.

드디어 1953년 10월 11일, 사천기지에서 2인용 경비행기 `부활호`가 시험비행에 성공한다. 민영락 씨가 시험조종사로 나섰고 제작자인 정비사 이원복 씨가 후방석에 동승했다. 첫 시험비행 기록은 약 2시간. 고도 1300m까지 비행했다.

- 처음 시험 비행을 할 때 무섭지는 않으셨나요?
(민영락 씨) “자신있게 했죠. 이형을 믿으니까, 또 이형은 나를 믿고 뒤에 탔고 말이야.” 두 분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서로를 믿는다’는 말이 이렇게 솔직담백한 말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 민영락씨 "서로가 서로를 믿고 날았지"

앞으로 소중히 간직해 주길

△ 이원복씨 "우리의 부활호, 소중히 물려줘야 해요."

“우리의 값진 자산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세태가 너무 아쉽다”는 이원복 씨. 오늘 시범 활주를 맡은 조종사 김진연 소령과 정비사 김혈영 준위의 손을 꼭 잡고 놓지 못한다. 오늘 부디 조심스럽게 잘 조종해 주기를,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무언의 부탁 같았다.


△ "어제의 팀과 오늘의 팀이 함께" 두 원로가 오늘 탑승할 김진연 소령, 김혈영 준위와 함께 섰다.

기사 사진 제공 = 공군 뉴스레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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