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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상표’로 본 대한민국 50년사




우리와 고락을 같이해온 술들. 특허청에 등록된 술 상표는 6만여 건에 달한다.

뿅뿅, 죽여주, 이빠이, 별난개구리, 거시기, 각일병 …
시대 변화, 희노애락 따라 무한변신

기사제공= 주간동아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그제 막잔을 들었다. 어쩌다 어제도 막잔을 들게 됐다. 어젠 정말로 막잔인 줄 알았다. 오늘도 역시 잔을 든다. 막잔이다.’
대학시절 어디선가 접한 잊지 못할 글귀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술에 대한 애착은 남다르다. 2005년 12월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2003년 기준으로 작성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건강자료 2005’ 등을 분석한 결과 2003년도 15세 이상 한국인 1인당 순알코올 소비량은 9.3ℓ. 이는 연간 국민 1인당 21도짜리 소주 123병(360cc 기준), 5도짜리 맥주 372병(500cc), 40도짜리 양주 46.5병(500cc)을 각각 마신 양에 해당한다.

한국 사회에서 술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직장생활은 물론이고 집안 대소사, 친구와의 만남에서 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매개물이다. 세상살이의 희로애락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를 웃고 울게 만든 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특허청(청장 김종갑)에 등록된 술 상표를 분석해보면, 지난 50여년간 우리 곁에서 명멸한 술들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등록된 술 상표는 소주 브랜드인 ‘진로(眞露).’ 1954년 9월 등록된 ‘진로’는 최장수 술 상표이기도 하다.

특허청에 등록된 술 상표 6만 건 넘어
2005년 11월 현재 특허청에 등록된 술 상표는 무려 6만5821건. 등록된 술 상표는 주종별로 소주·맥주·탁주·위스키·포도주·청주·약주·샴페인·매실주 등으로 나뉘지만, 가장 많은 상표가 등록된 술은 대중주인 맥주로 7365건에 달한다. 다음으로 위스키가 4050건, 소주는 3788건, 막걸리가 1586건이다. 소비량이 많은 이 4대 주종별 상표등록 건수를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맥주 상표등록은 1950년 이후 60년대까지 6건, 70~80년대 860건, 90년대 2568건, 2000년 이후 3931건으로 9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소주 상표는 1960년대까지 9건, 70~80년대는 516건, 90년대 1602건, 2000년 이후로는 1661건이 등록됐다. 막걸리는 60년대까지 1건, 70~80년대 249건, 90년대 447건, 2000년 이후엔 889건이 상표등록됐다.

특허청 분석에 따르면 술 상표 등록은 1990년 이후 대폭 증가했으며, 특히 2000년 이후 상표등록은 이전 10년 동안의 등록건수를 훨씬 초과한다. 이는 제품을 식별하기 위한 표장(標章)으로서의 상표 자체를 지식재산의 하나로 간주하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2005년 11월 현재 주종별로 등록된 상표의 명세를 살펴보면 우리 생활의 변화상과 궤를 같이해온 술 상표의 변천사를 가늠할 수 있다. 술 상표에는 한글상표와 영문상표 외에도 한자가 병기된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이는 특허청의 분류 시스템상 일목요연한 검색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 국민이 가장 즐기는 술인 소주, 맥주, 막걸리, 위스키를 중심으로 상표들의 흐름을 살펴보자.

‘대한민국 대표 서민주’인 소주의 경우, 1990년대 이전까지는 ‘진로’ ‘무학’ ‘선양’ ‘보배’ ‘고바우’ ‘보해’ ‘선(SUN)’ ‘금복주(KUMBOKJU)’ ‘경월’ 등 대다수 상표명이 제조업체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낙동강 페놀오염 사태 등으로 환경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한 1990년대에는 ‘경월그린(GREEN)’ ‘선양그린’ ‘금복슈퍼그린’ ‘맑은 샘 소주마을’ 등 청정하고 순수한 느낌을 강조하는 이름들이 상표로 등록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참이슬 진로’를 비롯해 ‘아이 참(i-charm)’ ‘슬기’ ‘참 사랑해’ ‘시원’ ‘천년미소’ 등 소비자에게 친근감을 주는 부드러운 상표들이 주를 이뤘다.

한편 ‘고래’ ‘택시(TAXY)’ ‘DMZ’ ‘겨울나그네’ ‘깊은 산속 옹달샘’ ‘이리 오너라’ ‘각 일병’ ‘거시기’ ‘쾌세라쾌세라’ ‘VIAGRA’ ‘박다리와 금봉이’ ‘폼생폼사’ ‘이빠이’ ‘개코’ ‘죽여주’ ‘일라그라’ 등 유머러스한 상표명도 적지 않다.

‘갈증 해소’의 대명사로 꼽히는 맥주는 1955년 8월 외국 주류업체 상표인 ‘CANADIAN CLUB’이 최초로 상표등록됐다. 60년대까지는 한국 업체의 상표가 등록된 적이 없다. 70년대 들어서야 국내 업체의 병맥주 상표로 ‘동양맥주(ORIENTAL BREWERY CO)’가 71년 6월 등록됐고, ‘OB’가 72년 9월에, ‘크라운(CROWN)’이 77년 9월 각각 등록됐다. 생맥주로는 ‘오비호프(OB HOP)’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88년 8월 상표등록이 됐다. ‘86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의 개최는 호프집, 카페, 가라오케, 디스코테크 등 각종 유흥 관련업소의 폭발적 증가를 불러와 맥주 소비를 촉진했다.

2000년 이후 ‘남남북녀’ ‘남북통일’ 상표 ‘이채’
90년대 들어서는 자사의 맥주 제품이 우수함을 드러내기 위해 ‘바이오’ ‘슈퍼’ 등의 단어가 상표에 따라붙으면서 ‘크라운 슈퍼드라이’ ‘크라운 바이오’ 등 새로운 상표가 등록된다. 이 시기는 또한 한국 맥주시장에 3파전을 불러오며 ‘맥주 삼국지’가 펼쳐진 때로 기존의 OB맥주 외에 93년 11월 상표등록된 ‘카스(CASS)’와 이듬해 3월 등록된 ‘하이트(HITE)’가 새롭게 등장해 지금의 맥주시장 판도의 기초를 닦았다.

2000년 이후는 6·15 남북정상회담의 영향으로 통일과 민족화합을 기원하는 ‘남북통일’ ‘남남북녀’ 등의 상표가 등록된 것이 이채롭다. 시대를 뛰어넘어 눈에 띄는 흥미로운 맥주 상표로는 ‘뿅뿅’ ‘kiss Me’ ‘별난 개구리’ 등이 있다.
막걸리의 경우 1965년 5월 ‘무학’이란 상표가 최초로 등록됐고, 70년대엔 ‘오복’ ‘복미인’ ‘홍매(HONG MAE)’ ‘백조’ 등이 뒤를 이었다. 그럼에도 80년 이전까지는 식량 자급자족 문제로 정부가 막걸리 생산을 엄격히 통제해 허가를 받은 양조장에서만 제조가 가능함으로써 상표 출원은 미미한 편이었다.

그러나 1980년 말 쌀막걸리 생산이 허용되고, 플라스틱 용기의 도입과 보존기술이 발달하면서 상표출원이 크게 늘어났다.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경기도 포천의 ‘이동 막걸리’가 88년 10월 상표등록이 됐고, 90년대에는 ‘국향’ ‘팔선’ ‘선농주’ ‘시나위’ ‘부아주’ 등과 함께 생전에 막걸리를 즐겼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칭한 ‘박통(PARK-TONG)’이란 상표까지 등록됐다. 2000년 이후 최근까지는 ‘만배불취’ ‘가루지기(KARUZIKEE)’ ‘느영나영 조껍데기’ ‘야 ~죽(竹)이네’ 등 해학적인 이름들이 상표로 등록됐다.

‘폭탄주’의 핵심 원료 위스키는 1958년 5월 ‘MARTINI’가 처음으로 등록된 뒤 2000년 이전까지 ‘JOHNNIE WALKER’ ‘PASSPORT’ ‘캡틴 큐(CAPTAIN Q)’ ‘CAMUS’ ‘DIMPLE’ ‘썸싱스페셜(SOMETHING SPECIAL)’ ‘쥬니퍼(JUNIPER)’ 등 영문 상표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90년대부터 ‘아가씨와 총각’ ‘고슴도치’ ‘그리운 친구’ ‘어매’ ‘인연’ ‘살포시’ ‘여운(YeoWoon)’ ‘산뜻’ ‘산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등 우리말 상표도 대거 등장하는 추세다.


이처럼 정겨운 상표를 붙인 옛 술들은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 그만이다. 2005년 5월1일 문을 연 충북 충주의 술문화 박물관 ‘리쿼리움’(www.liquorium.com)에는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개관 이후 지금까지의 연 관람객은 1만5000여명. “주류업체에 근무하던 시절 한때 ‘폭탄주’를 30잔까지 마신 적도 있을 만큼 술을 즐겼다”는 리쿼리움 박용환(53) 관장은 “관람객들이 전시된 옛 술들을 보고 무척 반가워하며 젊은 시절 술에 취해 벌인 객기 어린 행동을 반추하곤 한다. 옛 술을 구입할 수 있느냐고 문의하는 관람객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술 상표가 판매량 좌우 … 참이슬 빅히트

△1954년 9월 우리나라
최초로 등록된 술 상표
인 `진로`.특허청에 등록된 술 상표들이 모두 실제 상품의 출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특허청 상표심사팀 신의진 사무관은 “면밀히 분석해보진 못했지만 등록된 술 상표 가운데 실제로 사업화되지 못한 채 사장된 것도 많을 것이다”며 “상표권자가 상표를 국내에서 3년간 사용하지 않을 경우 다른 사람이 ‘상표권 불사용 취소 심판’을 청구하면 상표 등록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다”고 밝힌다.

술 상표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술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상당수 명칭들도 버젓이 술 상표로 등록돼 있다는 점. 예컨대 프로야구단인 삼성라이온즈가 1983년 6월 등록한 ‘라이온즈’(맥주), 의류업체인 ㈜쌍방울이 85년 8월 등록한 ‘쌍방울’(소주), ㈜샤니가 92년 7월 등록한 ‘파리바게뜨’(맥주) 등은 모두 술과 관련된 상품유사군별 출원상표로 돼 있다.

한국철도공사가 상표권자인 ‘치포치포’도 그중 하나로, 소주와 맥주 상표로 등록돼 있다. 한국철도공사의 전신인 철도청이 2002년 2월 등록한 이 상표는 본래 철도 이미지 홍보를 위한 철도공사 고유의 캐릭터 이름. 한국철도공사 연구기획팀 관계자는 “주류업체가 아닌 기업이 자사의 상표를 술 상표로까지 등록해놓은 것은 상표권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책”이라며 “실제로 주류사업에 뛰어들기 위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상표가 마케팅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대 요소인 만큼 주류제조업체들은 상표 하나에도 사운을 건다. 1998년 10월 고급 소주를 표방한 ‘참이슬(참진이슬로)’로 빅 히트를 친 진로그룹의 한 관계자는 “자율화, 개방화, 국제화 추세가 두드러졌던 90년대 중반부터 주류업계에 술이라는 제품의 감성적 면모를 소비자에게 적극적으로 호소하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기존에 사용하던 회사 명칭 대신 좀더 부르기 친근한 상표로 바뀌었다”고 밝힌다.

제품 출시 시점과 같은 1998년 10월 상표출원돼 2000년 9월 등록된 ‘참이슬(SINCE 1924 JINRO)’은 국내 소주시장을 석권해 올해 4월이면 출시 7년6개월 만에 100억병 판매를 돌파하는 대기록을 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1병 용량이 360cc인 ‘참이슬’ 100억병의 용량은 코엑스 아쿠아리움 수족관 전시탱크 용량(2300t)을 1565번 갈아치울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1924년 창립한 진로그룹이 그 후 70여년간 팔아온 ‘진로’ 상표를 단 소주의 판매량보다 ‘참이슬’의 7년여간 판매량이 더 많을 정도다. 이는 단일 소주 브랜드로는 국내 최다 판매량이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전문회사 ‘크로스 포인트’의 손혜원 대표는 “제품의 특징이 뚜렷한 술, 예를 들어 증류식 소주라면 거기에 합당한 네이밍(naming)을 하는 것이 좋겠지만, 품질의 차이가 별로 없는 일반 희석식 소주의 경우 상표를 정할 때 경쟁사의 기존 상표의 아류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소비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신선한 발상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참이슬’ ‘산’ ‘참나무통 맑은 소주’ 등의 브랜드 네이밍을 직접 맡아온 손 대표는 ‘히트 브랜드 메이커’로 통한다.

술은 사람과 부대끼며 생명력을 이어간다. 지금도 술 상표의 변신은 거듭되고 있다. 특허청에 출원되는 술 상표는 매월 100여 건 이상이다. 2005년의 경우 한 달에 적게는 136건에서부터 많게는 263건까지 출원됐다.

이제 또 어떤 이름의 술들이 탄생해 우리와 고락을 이어갈까. 술 상표를 분석한 특허청 신의진 사무관도 애주가다. 그의 귀띔이다. “‘진로’가 상표등록된 1954년에 태어나서인지 소주를 좋아한다. 특히 ‘참이슬’이 입에 맞는 것 같다. 주량은 한 병이다.”

어떤가! 지금쯤 한잔 생각이 절로 나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아마도 ‘호모 비불루스(술을 알고 즐길 줄 아는 인간)’임이 틀림없다.
기사제공= 주간동아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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